기록화의 전복적 재전유를 위한 시작

 

작가는 스스로 작업에 대해 ‘ 기록화를 전복하는 기록화’, ‘전복 기록화로’로 위치짓기했다. 그는 기록화를 프로파간다를 위한 과거-실제의 박제화가 아닌, 실존의 치부를 드러내기 위한 현재-실재의 기록으로 전유하고, 우리가 그것을 마주하는 과정에서 성찰하기를 바라며 궁극적으론 변화된 세계와 삶을 희망한다. 작가 노트나 언행에서 나타나는 단호함은 작가로서 매체와 주제적으로 매우 뚜렷한 특징을 부여하는 동시에 해석과 비평의 전형성을 갖게 하는 양날의 검이다.

 

인천아트플랫폼은 작가에게 청주창작스튜디오(2012)와 OCI레지던시(2014)에 이은 세 번째 레지던시이다. 레지던시가 작가를 발굴·지원하는 주요 제도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작업과 이동의 궤적에서 이번 레지던시를 기점으로 미묘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이 글은 레지던시 동기로서 2016년 3월부터 9월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감지한 변화의 시작에 대한 짧은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다중의 심리 지도 풍경

 

작업을 처음 보았을 때 인터내셔널 상황주의(Situationist International)의 심리지도(psychogeography)가 떠올랐다. 작가는 시민 주체의 성찰을 위해 천안함 침몰, MB산성, 숭례문방화사건, 외규장각귀환, 나로호와 대포동 미사일, 독도 문제, 구제역 사건 그리고 세월호 사건 등 2010년 이후 정치 사회적 사건을 재구성했다. 제도적 작가의 성찰을 위해 인사동, 아트페어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분관 화재 사건을, 종가집 구성원으로서 개인의 성찰을 위해 장례식, 결혼식, 제사 등의 상황을 선택해왔다.

 

익숙한 시공간은 지리적 좌표 설정처럼 자본의 스펙타클 자체인 도시 일상성이 가져오는 장소성의 균질화를 드러낸다. 익명의 수많은 군상들의 미시사는 마치 문화기술지文化記述誌 ethnography와 같다. 거리를 두고 보면 복사-이어붙이기와 같은 대중과 같지만, 한 걸음 조금 더 깊이 바라보면 집단적 실존의 형태이지만, 정치적 단일성을 거부하는 개인과 집단 사이 중간 지대에 있는 다중의 실재이다. 또한, 개인적 주체와 직업적 주체 그리고 공동체적 주체로서의 상황을 익숙한 시공간 위에 개인적 집단적 기억과 경험을 상당히 계산적이고 기능적으로 재배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마(麻)에 수간 채색을 하고 다원 시점, 이동 시점 그리고 조감법, 부감법, 이시동도법을 사용하는 전통 지향적 매체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란 기능적 성격은 다중의 심리지도 풍경으로써의 의미를 전복적으로 밀어 붙이기엔 뒷심이 부족해 보이는 아쉬움이 있다. 섬세하고 치밀한 표현과 정돈된 화면은 실존의 부조리함의 불편함과 거칠음보다 스펙타클의 쇄말리즘적 부드럽고 말랑한 상황으로 인식하게 만들고 관람객은 성찰을 위한 전복의 충격에 앞서 상황 이해를 위한 학습을 먼저 요구받는다.

 

전복적 기록화를 위한 다른 정치성

 

작가는 2016년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이후 작가로서 지속가능한 작업을 위한 여러 고민을 한다. 입주 중간보고 전시의 성격을 가진 <웻 페인트 Wet Paint>(인천아트플랫폼, 2016)에서 특수 채색으로 헤어드라이어의 바람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꼬인 줄>과 <무대 뒤에서>, 전시장에 출퇴근하며 작업을 수행하는 <흔적의 힘><노동요> 그리고 결과인 <벌초대행도> 그리고 <고립무원>과 <직장회식계회도>는 그러한 고민의 흔적이다. 자칫 전통 매체를 다루는 평면 작가의 일탈 혹은 퇴행으로도 읽혀 질 수 있을 퍼포먼스나 인터랙티브 그리고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의 참여 등은 2010년 초반까지 전통 회화의 현대적 재해석이란 표제 아래 주목받는 신진 작가로서의 시간을 지나 기존 주제와 방법에 대한 자기-성찰을 위한 작업의 조건들, 상황들을 낯설게 하기의 하나이다.

 

전통 기록화를 전유하고자 하는 동시대 미술 작가의 고민은 종가집 자제로서 경험된 사회 정치적 조건들을 극복하려는 개인의 고민과 중첩된다. 많은 전통 회화 중 기록화를 선택한 것은 작업의 과정과 결과를 공동체와 공유하려는 적극적 개입 그리고 상당한 정치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작업은 미시-거시, 개인-공동체, 기록-묘사, 전통-동시대 등 복잡하게 얽힌 수많은 축 위에 놓이는데, 그 중 ‘기록’을 어떠한 맥락으로 가져갈 것인가가 주요하게 등장한다.

 

기록(記錄)의 사전적 의미는 후일에 남길 목적으로 어떤 사실을 적음 또는 그런 글인데, 영어로는 record, document, archive, description, depiction 등으로 번역 될 수 있다. 작가는 기록을 record으로 사용하는데, record가 기록하여 재생하는 기능적이고 기계적 수행을 중심의 개념이라고 할 때, 작업의 과정과 의미가 기능적 해석에 제한되지 않도록 다른 기록의 의미가 필요하다. 기능적 개념으로 한정될 경우, 사실과 가상이 결합한 실재로서 작업보단 기록이 갖는 설명과 기술(記述)적 성격으로 작업의 맥락이 평면적이고 뻔해 질 수 있다.

 

이제까지 작가는 매스미디어에서 주요하게 등장한 정치와 사회 이슈 그리고 미술 제도와 사적 경험의 이슈를 다루어 왔는데, 이는 매우 현실 정치적이고 사회적 주제 의식을 보여주었다. 현실의 부조리함의 상징으로써 여러 사건들과 상황들이 유의미하지만, 자칫 소재주의와 계몽주의에 빠질 수 있다. 작업에 대한 설명과 이해도 중요하지만, 작업이 작가 스스로, 관람객을 포함한 우리 그리고 세계와 조우하고 공감하고 성찰할 수 있는 알레고리가 되려면, 전복이 갖는 정치성의 의미에 대해 다시 고민할 시기이다.

 

작가는 이번 레지던시 기간에 다양한 경험과 시도를 해서 작가로서 자기-성찰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 말했었다. 그렇기에 2017년 예정된 개인전에서 다시 회화로 돌아갈 것이라 예고는 새로운 기대를 품게 한다. 어쩌면 전통 회화의 현대적 재해석이란 동시대 작가로서 익숙한 클리세(cliche)가 자본의 재생산 구조에서 균질화되는 도시 공간에서의 우리의 삶과 결코 다르지 않기에 그러한 조건들을 가로지르면서 재전유할 수 있는 희망의 공간으로서 회화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채 은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