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관습을 전복하는 기록화
최현석의 회화는 눈길을 끄는 힘이 있다. 전통기록화를 닮은 독특한 작품 형식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기록화, 민화, 고지도의 다양한 패턴, 다원적 시점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며 화폭에 동시대 이슈를 자유분방하게 담아낸다. 요즘 작가들이 사진, 영상 등의 매체에 의존하는 것에 비해 그는 선조들이 그린 그림에서 흥미로운 요소들을 발견하고 독자적인 길을 개척한다. 그의 작품에는 따로 사인이 필요 없다. 최현석의 작업에서 흥미로운 점은 전통 기록화 고유의 권력적 속성을 전복한다는 것이다. 그는 “전통 기록화는 권력자들이 당대의 영광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기록으로 남긴 욕망의 산물” 이라고 말한다. 학부시절 그는 박물관에서 기록화를 처음 접하고 감응과 동시에 불편함을 느꼈다고 한다. 전통 기록화는 일반적으로 값비싼 종이나 비단에 그려진 것이지만 그는 천연 직물 중에서 가장 저렴한 재료인 마직물을 선택했다.
작품의 주제도 부조리한 현실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권력을 정당화하는 전통 기록화와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천안함 사건을 그리기 시작해 초기에는 구제역. 국립현대미술관 화재 등 동시대 사건에 집중했다. 최근에는 미디어에 노출된 장면이라도 자신만의 관점을 확보한 상황을 그리거나 장례식, 결혼식, 종갓집, 예비군 훈련 등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상에서 관습을 내면화하는 불편한 지점을 그린다. 하지만 그는 작업을 통해 개인의 목소리를 내기보다 하나의 사건 혹은 풍경을 관조하는 방식을 택한다. 현실의 모순 그 자체를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화폭에 옮기는 것이다. 이때 작가는 사건이나 풍경을 입체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구체적인 상황도 동시에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이 내포하는 상황은 상당히 복합적이고, 화폭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예를 들어 장례식장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하면 집중해서 머릿속으로 떠올린 장례식장면을 그림으로 옮긴다. 고인은 아직 관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그의 사진 앞에서 사람들은 절을 하고, 조의금을 모으는 상자에는 자물쇠가 잠가져 있다. 사람들 대부분은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는 준비된 음식을 먹기 바쁘다. 어떤 이는 식장에 화환을 누가 보냈는지 명단을 정리하고 식장 한 켠에서 화투를 치는 사람들은 ‘호상好喪’이라고 외친다. 작가는 그림을 다 그리고 나면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불편한 지점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완성된 작품에 ‘장례호상도’라는 제목을 붙였다. 사람들은 쉽게 ‘호상’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그는 참 잔인한 말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작가는 작품 제목을 마지막에 정하는데 이것이 작업의 직설적인 힌트라고 넌지시 말한다.
기록화의 힘은 전달력이다. 작가가 생각한 지점을 관람객도 가장 근접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록화는 매력적인 도구이다. 그는 작가가 왜 이 장면을 기록했는지 관객이 의문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기를 바란다. 그의 작품에서 인물들은 얼굴 표현이 없는데 특정인물로 간주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구분 짓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주제를 공유하고 함께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를 제안한다.
작품의 주제는 비판적이고 무겁지만 최현석의 작품은 밝고 화사하다. 그래서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그는 불편한 내용을 불편하게 그리기 싫다고 말한다. 그리고 “현실의 문제를 당장 해소할 수는 없지만 반성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예술의 반성적 원리는 작가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제가 비판적으로 그린 그림을 내가 어느 순간 그대로 한다면 그 그림은 거짓말이 되고 말죠. 갈수록 더 신중하게 작업하고 내 그림에 책임감을 지려고 합니다.” 앞으로 작가는 보다 다양한 주제를 기록화형식으로 선보일 것이며 틈틈이 영상, 입체작업 등의 실험도 병행할 생각이다.
이 슬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