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석의 그림
인터넷 기사를 읽는 재미 중 하나는 글중 끝에 주렁주렁 영근 댓글이다. 장황한 기사나 댓글이다. 장황한 기사나 댓글 아래엔 으레 “한줄 요약 좀”이 달린다. 빈곤한 독해력 탓에, 혹은 정말 딱 그 댓글 달 짬밖에 없어 그럴 법도 하나, 대개 현대인의 사고 회로, 감성 회로는 한 줄 안에 켜지 않으면 도무지 불이 붙지 않는다. 번개탄에 화염방사기까지 동원해야 타오를까 말까한 장작에 쌀 안칠 바에 굶고 만다. 꼭 찰나지간을 고집함은 아니어도, 일종의 직관적 수긍, 곧 납득이 절실한 것이다.
미술은 홀로 고상하지도, 세속에서 유리되어 특별하지도 않다. 대상과 결과 모두 현실 안에 자리할 뿐이며 응당 그 제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현대인의 회로를 헤아리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묻건대, 좋은 그림은 무엇인가?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많은 도록과 인터뷰 추출물의 교집합은 ‘보는 이의 가슴에 거리낌 없이 와 닿고, 그래서 연거푸 곱씹을 만한’이라 이구동성 외친다. 와 닿고 곱씹을 만하단 것은 곧 그 자체로 납득의 가능성을 넉넉히 머금었단 이야기. 납득은 좋은 그림의 핵과 같다.
중세엔 신의 은총이 팍팍 와 닿아야 납득 가는 그림, 좋은 그림일 것이다. 너무 저급하고 노골적이면 안 된다. 뒷골목 어귀에 쭈그린 예수가 사탄을 삥뜯거나, 근처에 뒹굴던 베드로가 엉덩이로 ‘예수♡짱’을 쓰는 작품은 썩 좋지 못하다. 너무 텁텁하고 어려워도 안 된다. 시력이 반 토막 나도록 거듭 훑고, 대뇌피질이 피 질질 흘리도록 해골을 싸매야 감질 나는 은총 부스러기가 어렴풋이 느껴진다면, 중지는 몰라도 엄지를 호쾌히 치켜세우긴 망설여지리라.
이에 곱씹을수록 와 닿을 그림을 하나 제안한다. 최현석의 그림은 노동 집약적이라기 보단 관찰 집약적이며, 또한 수십 층 이야기의 무한 재구성 과정을 고려하면 사고 집약적이라 해야 적절할 듯 싶다. 구구절절 안 풀어도 알아서 풀 수 있는 그림, 줄곧 볼 수 있길 염원한다.
김 영 기